지난 글에서 에버노트와 엑셀을 떠나 노션과 구글 시트로 갈아탄 이야기를 풀었습니다. 그 글 마지막에 "다음 글에선 실제로 만들어본 견적 관리 시스템 이야기를 하겠다"고 적어뒀는데, 그때는 아직 시스템이 완성된 게 아니라 도구만 옮겨놨을 뿐이었죠.
진짜 일은 그다음부터였습니다. 몇 년간 에버노트에 쌓아둔 천 건이 넘는 견적과, 거래처에서 받은 거래명세서를 서로 연결하는 작업. 이게 생각보다 훨씬 큰일이었습니다.
견적 한 건이 거래명세서 한 건이 아니었다
처음엔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금액이 같고 거래처가 같으면 짝을 지어주면 되겠지, 하고요. 그런데 막상 해보니 견적과 거래명세서는 깔끔하게 1:1로 맞아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한 달치 견적을 모아 한 번에 발주가 나가기도 하고, 반대로 하나의 거래가 여러 견적으로 쪼개지기도 했어요. 거래명세서 한 장 뒤에 견적이 여러 개 숨어 있는 구조였던 겁니다.
게다가 견적을 낼 때의 가격과 실제 발주가 확정될 때의 가격이 조금씩 달라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금액이 같으면 연결" 같은 단순한 규칙으로는 절반도 맞추지 못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도구가 아니라 데이터였다
규칙을 조금씩 다듬어가며 맞추는 비율을 올렸지만, 어느 순간 천장에 부딪혔습니다. 한참 들여다보다 원인을 찾았는데, 에버노트에서 노션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본문 내용이 빠져 있었던 거예요. 메일 내용, 메모, 거래 맥락 같은 것들이요. 숫자만 덩그러니 남고 사연은 사라진 셈입니다.
재미있는 건, 그 빈 데이터만으로도 절반 넘게 맞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거기가 한계였어요. 그래서 빠져 있던 본문을 따로 추출해 보관하기로 했습니다. 노션에는 깔끔한 숫자 데이터만 두고, 본문은 별도의 참고 자료로 떼어놓는 방식으로요. 데이터베이스는 깨끗하게, 맥락은 작업용으로. 이렇게 나누고 나니 못 맞추던 건수가 열에 여덟쯤 줄었습니다.
지난 글에서 "도구보다 시스템이 먼저"라고 했는데, 이번엔 한 가지를 더 배웠습니다. 시스템이 아무리 똑똑해도 그 안에 담긴 데이터가 부실하면 거기까지라는 것. 검수라는 작업 자체가 의미를 가지려면 데이터부터 제대로 갖춰져 있어야 했습니다.
결국 열쇠는 '내가 일하던 방식'이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따로 있었습니다. 막혀서 끙끙대다가 문득 예전 습관이 떠올랐어요. 저는 에버노트에 기록할 때 제목에 "여기까지 ○월분 마감"이라고 적어두곤 했습니다. 매달 한 번 그 표시를 기준으로 위쪽 견적들을 쭉 훑으면서 금액을 맞추던, 제 나름의 정산 방식이었죠.
이 패턴을 시스템에 적용해보자 비로소 맞아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거래명세서 금액과 딱 떨어지는 그 지점이 곧 '마감'이고, 그 위는 정산 완료, 그 아래는 다음 달로 넘어가는 식. 결국 자동화라는 건 거창한 게 아니라, 제가 손으로 하던 일을 그대로 옮겨놓는 작업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습니다.
바꿔 말하면, 제가 모르는 일은 자동화할 수도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시스템을 설계한 건 제 손이 아니라 제 경험이었어요.
과거에 너무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욕심을 부리자면 지나간 거래까지 빠짐없이 완벽하게 맞추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몇 주씩 거기에 매달리는 게 과연 남는 장사인가 싶더군요. 이미 끝난 거래는 분석용 자료일 뿐이고, 정작 중요한 건 앞으로의 운영이니까요.
그래서 기준을 둘로 나눴습니다. 지나간 데이터는 적당한 선에서 정리하고, 올해부터의 거래는 빈틈없이 관리하기로요. 견적만 받고 거래로 이어지지 않은 건은 따로 보관함으로 넘기고, 실제 거래가 일어난 건은 끝까지 추적해 마무리 짓는 식입니다. 어중간하게 떠 있는 상태를 남기지 않는 것, 그게 목표였습니다.
정리하며
이번 작업에서 얻은 교훈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도구가 똑똑해도 데이터가 부실하면 딱 거기까지다. 자동화는 결국 내가 일하던 방식을 옮기는 일이다. 그리고 완벽하게 설계하려 들기보다 일단 굴리면서 고쳐나가는 게 빠르다 — 이건 지난 글에서 했던 이야기를 이번에 몸으로 다시 확인한 셈입니다.
한 가지 더. 아무리 자동화해도 사람이 직접 확인하는 단계는 남겨둬야 한다는 것. 대부분은 시스템이 알아서 처리하되, 애매한 것들은 결국 제 눈으로 봐야 정확하더군요.
시스템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지나간 데이터를 마저 정리하고, 다른 작업장 자료까지 붙이고 나면 그때가 진짜 시작이겠죠. 그 과정도 틈틈이 기록으로 남겨보겠습니다.
· 도구만 옮긴다고 시스템이 완성되는 게 아니다 — 흩어진 데이터를 연결하는 게 진짜 일이다.
· 도구가 똑똑해도 데이터가 부실하면 딱 거기까지. 자동화의 천장은 데이터 품질이 정한다.
· 자동화는 결국 '내가 일하던 방식'을 그대로 옮기는 것. 내가 모르는 일은 자동화할 수 없다.
· 과거 데이터는 적당히, 앞으로의 운영은 빈틈없이 — 완벽주의보다 우선순위.
👉 이어지는 글: AI 데이터 검수, 맡겼지만 못 믿어서 다시 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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