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컴퓨터에는 십수 년치 견적 기록이 쌓여 있습니다.
지난번에 이걸 AI한테 맡겨 정리했다는 이야기를 적었는데, 오늘은 그 정리 과정에서 발견한 이상한 것 하나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정리가 목적이었지 뭘 발견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뜻밖의 것이 걸려 나왔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오류인 줄 알았습니다.
내 머릿속에만 있는 줄 알았다
저는 견적을 감으로 낸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도면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 "어떻게 그 숫자가 나왔어요?" 하고 물으면 말로 설명하긴 힘듭니다.
오래 하다 보니 몸에 밴 거지, 어디 적어 둔 공식이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이 감이라는 건 제 머릿속에만 있고, 제가 그만두면 같이 사라지는 거라고 여겼습니다.
기록에 남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요. 누구한테 물려주려 해도 방법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가르치려면 말로 옮겨야 하는데, 저부터가 설명하기 어려우니까요.
숫자가 딱 떨어지더라
AI가 수천 장의 기록을 표로 정리해 준 걸 훑어보다가 눈에 걸리는 게 있었습니다.
작업 시간 항목의 값들이 이상하게 딱 떨어졌습니다. 3시간, 1시간 반, 이런 식으로요. 수천 건이 몇 개의 깔끔한 숫자에 몰려 있었습니다.
기계가 잰 값이라면 이럴 수가 없습니다. 측정을 했다면 2시간 47분 같은 어중간한 숫자가 잔뜩 나왔겠죠.
그런데 그런 값이 거의 없었습니다. 순간 AI가 정리하면서 숫자를 반올림해 버렸나 의심부터 들었습니다.
그런데 잠깐 생각하고 나서 알았습니다. 이건 잰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 가늠해서 손으로 적은 숫자라는 걸요. 그 사람은 저였고요.
그건 내 습관이었다
돌이켜 보니 그렇습니다. 견적을 낼 때 저는 작업 시간을 세 시간, 한 시간 반, 이런 단위로 끊어서 가늠합니다.
두 시간 사십 분이라고 적어 본 적이 없어요. 그 사이 값은 제 머릿속에 아예 없는 겁니다. 제 머릿속 자에는 눈금이 그 간격으로만 새겨져 있는 거죠.
한 번도 의식한 적 없는 손버릇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수 년을 같은 버릇으로 적다 보니, 수천 장에 같은 무늬가 찍혀 있었던 거죠. 지문처럼요. 감으로 낸다고 말해 온 그 견적에, 사실은 저만의 일정한 리듬이 있었던 겁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일을 십수 년 하는데 매번 다른 방식일 리가 없죠.
다만 그 방식이 어딘가에 적히고 있다는 걸 몰랐을 뿐입니다. 저는 견적서에 금액을 적는다고 생각했지, 제 버릇을 적고 있다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요.
데이터가 거울이 되어준 순간
재미있는 건 AI가 새로운 걸 만들어 낸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숫자는 원래부터 거기 있었습니다.
다만 수천 장에 흩어져 있어서 안 보였을 뿐이죠. 한 장 한 장 볼 때는 그냥 견적서였는데, 한자리에 모아 놓으니 그제야 무늬가 드러난 겁니다.
| 감으로 안다고 여겼던 것 | 사실 기록에 남아 있던 것 |
|---|---|
| 견적은 그때그때 직감으로 낸다 | 일정한 단위로 끊어 가늠하는 리듬이 있다 |
| 내 방식은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 수천 장에 같은 패턴으로 찍혀 있다 |
| 내가 그만두면 사라진다 | 기록을 모으면 다시 읽어낼 수 있다 |
막연히 "내 방식"이라고 부르던 것이 처음으로 눈에 보이는 형태가 됐습니다.
거울을 본 기분이었습니다. 평생 제 얼굴을 못 보다가 처음 본 것처럼요.
남의 일하는 방식은 옆에서 보면 잘 보이는데, 정작 제 것은 이렇게 데이터를 거쳐서야 봤습니다.
오래 한 일에는 흔적이 남는다
머릿속 감은 기록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틀렸더라고요.
감으로 한 일도 손을 거치는 순간 어딘가에 흔적을 남깁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요.
그 흔적이 쌓이면 무늬가 되고, 무늬는 언젠가 읽힙니다.
사실 대단한 장비나 분석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흩어진 걸 한자리에 모으는 것, 그게 전부였으니까요.
비슷하게 오래 한 일이 있는 분이라면, 그 일의 기록 어딘가에도 본인만의 무늬가 새겨져 있을 겁니다.
저는 기록을 안 지우고 쌓아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안에 뭐가 더 새겨져 있을지는 저도 모릅니다.
또 발견하면 그때 적겠습니다.
'📁 인사이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업무 도구 정리, 하나에 다 담지 않고 역할을 나눈 이유 (0) | 2026.07.10 |
|---|---|
| 세무 마감 자동화, 같은 실수 반복 않으려 규칙으로 남긴 후기 (0) | 2026.07.08 |
| 소상공인 AI 지원사업, 4천만 원 공고 직접 읽어본 후기 (0) | 2026.06.25 |
| 오래된 견적서 활용, 쌓아둔 자료가 회사 자산이 된 이야기 (0) | 2026.06.16 |
| AI 코드 리뷰, 시니어 개발자 수준인지 직접 물어본 후기 (0) | 2026.06.11 |